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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타일러의 난

와트 타일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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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타일러의 난(영어: Wat Tyler’s Rebellion) 또는 농민의 난(영어: Peasants’ Revolt), 대봉기(영어: Great Rising)는 1381년에 잉글랜드를 휩쓴 대규모의 민란이다.

민란의 원인은 1340년대 흑사병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정치적 긴장, 백년전쟁으로 인한 높은 세금, 런던 중앙정부의 지방 통치의 불안정화 등 다양했다.

민란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1381년 5월 30일에 왕실 관리인 존 뱀프턴(영어: John Bampton)이 에식스에서 미납된 인두세를 걷으려 한 사건이었다.

뱀프턴의 인두세 징수 시도는 폭력적 충돌로 끝났고, 이것은 잉글랜드 동남부 일대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지역 장인에서부터 동네 구실아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농촌 사회 구성원들이 봉기에 동참하여 재판기록을 불사르고 감옥문을 열어젖혔다.

난민들은 세금의 삭감과 소위 농노제라 알려진 비자유 노동의 철폐, 국왕의 고위 관리들과 법관들의 제거를 요구했다.

급진적 성직자 존 볼의 설교가 난민들을 고무시켰고, 켄트주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봉기군은 런던으로 진격했다.

농민군과 잉글랜드 왕국 정부 대표들은 블랙히스에서 회동하였다.

정부측은 농민군의 해산과 귀경을 종용하였으나 설득에 실패하였다.

왕국군 병력의 대부분은 해외와 잉글랜드의 북부에 주둔한 상태였고, 당시 나이 14세였던 국왕 리처드 2세는 런던탑으로 피신하였다.

6월 13일, 농민군은 런던에 입성하여 런던 읍민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감옥을 공격하고 사보이 궁전과 템플지구의 법조원을 파괴했으며 법령문서에 불을 지르고 왕국 정부와 관련된 자는 누구든 잡아다 죽였다.

다음날, 리처드는 마일엔드에서 농민군과 만나 농노제의 폐지를 포함한 그들의 요구 대부분을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동시에 농민군은 런던탑에 진입하여 대법관 사이먼 서드버리와 재무경 로버트 헤일스를 찾아내 죽였다.

6월 15일, 리처드는 도시를 나가 스미스필드에서 타일러를 비롯한 농민군과 만났다.

폭력사태가 발발했고, 리처드의 수행원들이 타일러를 죽였다.

 

리처드 런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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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민병대를 조직할 때까지 긴장 상황을 완화시켰고, 그 이후에는 즉시 런던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농민군과 맺은 약속들을 모조리 철회했다.

민란은 이스트앵글리아로도 번져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공격당하고 많은 왕국 관리들이 죽임을 당했다.

6월 25일 또는 26일, 노스월셤 전투에서 헨리 디스펜서가 난민들을 격파할 때까지 이 지역의 소요는 계속되었다.

한편 요크, 베벌리, 스카버러 등 북부의 도시와 브리지워터, 서머싯 등 서부의 도시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리처드는 질서 복원을 위해 약 4천 명의 군인들을 동원했다. 반란 지도자 대부분은 추적 끝에 처형당했다.

그해 11월까지 최소 1,500 명의 반란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와트 타일러의 난은 학자들에 의해 널리 연구되어 왔다.

19세기 말의 역사학자들은 봉기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당대 연대기들에서 다양한 문헌을 사용했고, 이는 20세기 들어 궁정기록이나 지역 기록보관소 등을 이용한 연구로 보강되었다.

난에 대한 해석은 수년에 걸쳐 이동했다.

한때는 영국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하기도 했으나, 현대 학계는 난이 이후의 사회경제적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소 확신하지 않고 있다.

와트 타일러의 난은 이후 의회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올리는 것을 단념케 함으로써, 백년전쟁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윌리엄 모리스 등의 사회주의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정치적 좌익에게 강력한 정치적 상징으로 남아, 1980년대에 있었던,

영국 정부가 지역 주민세 도입을 추진한 것과 관련하여 발생한 충돌에도 영향을 미쳤다.

배경과 원인

 

와트 타일러의 난이 촉발된 계기는 14세기에 나타난 경제 및 사회의 대격변이었다.

14세기가 시작할 무렵, 잉글랜드 사람 대부분은 전원지대에 거주하면서 나라의 읍성과 도시들을 먹여살렸으며 복잡한 경제체제의 일원이었다.

잉글랜드 전역 대부분에서 생산활동은 신사층·교회 등의 지역 영주가 통치하는 장원 주위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장원 재판소의 사법체계에 따라 통치되었다.

생산을 담당한 경제활동인구 중 일부는 비자유신분인 농노였으며, 매년 일정 기간동안 영주의 땅에 속박되어 일해야 했다.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자유농민과 농노의 비율은 다양했고, 잉글랜드 남동 지방은 상대적으로 농노가 적은 편이었다.

일부 농노들은 태어날 때부터 비자유 신분으로 태어나 영주의 허락 없이는 장원 바깥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없었다.

일부는 자신들의 신분의 부자유를 농토에 대한 사용권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농노도 있었다.

인구 증가는 농경 가능 토지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졌고, 지역 지주들의 권력이 증가하였다.

1348년, 흑사병으로 알려진 대역병이 유럽 대륙에서 건너와 잉글랜드를 휩쓸었고, 인구의 약 50 퍼센트가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경제적 타격이 정점을 지나갈 무렵 잉글랜드는 변화한 경제적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농민 계급의 높은 사망률은 곧 갑자기 토지가 풍부해지고 이에 반해 인력 수급은 수요 이하가 됐음을 의미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일에 대해 더 비싼 수당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 경쟁의 결과로 임금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것은 지주들의 이익 감소를 초래했고,결과적으로 읍 단위의 교역, 상업, 재정 네트워크가 붕괴하였다.

당국은 긴급 법안(1349년의 노동자 조례와 1351년의 노동자 법령)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혼돈상태에 대처하려 했다.

이 법안들은 노동자 임금을 대역병 이전의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을 골자로 했으며, 일을 거부하거나 현존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이 시스템은 처음에는 특수 법관들을 통해 시행되다가, 1360년대 이후로는 일반 치안판사들에 의해 집행되었고, 그 치안판사들은 대개 지역 신사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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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인 추가 임금

 

원칙적으로는 추가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더 비싼 값을 부르려 한 사용자 모두에게 적용되었어야 하나, 대개 법은 제멋대로 해석되어 노동자들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1361년, 법은 강화되어 벌칙에 단근질과 투옥 등이 추가되었다.

이후 몇 십년 동안, 잉글랜드 농민들의 경제적 기회는 증가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과거에는 금지되었던 특수직종을 갖게 되었고, 또다른 이들은 이 사용자 저 사용자를 옮겨다니거나, 부유한 집안의 시종이 되었다.

이 변화는 런던 시장이 세워져 농민들과 장인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만들어진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특히 예민하게 느껴졌다.

지역 영주들은 농노가 장원을 떠나지 못하게 할 권리가 있었으나, 장원 재판소에서 자신들의 봉쇄된 처지를 재확인한 농노들 대다수는 그냥 도망하여 다른 장원에 가 불법적으로 일했다.

임금은 계속해서 상승하였고, 1340년대와 1380년대 사이에 전원지역 노동자들의 구매력은 약 40 퍼센트 증대했다.

하층 계급의 부가 늘어남에 따라, 의회는 1363년 식이복장조례를 통과시켜, 과거 엘리트들만 누릴 수 있었던 값비싼 상품들을 하류층이 소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사치금지법은 강제집행이 거의 불가능했으나, 계속해서 많은 노동 관련 법규가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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